Centre de ressources Le monde littéraire de LEE Seung-u

-이승우 장편 소설 « 지상의 노래 »에 대하여

Article paru dans la revue Littor, Séoul, 2019 2/3 pp208-221

고행의 여행

인자요산(仁者樂山)

논어, 옹야 .

이승우의 문학 세계를 집약하는 작품을 유독 한 편만 뽑아야 한다면, « 지상의 노래 »가 아닐까. 욕망, 섹슈얼리티, 죄의식, 고행, 다른 세상[1], 그리고 시간적 배경을 이루는 군사 독재 시대 등 이전 작품들에서 이미 다룬 주제들이 모두 이 한 권의 소설에 응집해 있다. 그것은 또한 작가의 문체로도 증명된다. 작가가 직조한 명제들 속에서 선택의 부재를 이토록 멀리까지 몰고 가는 작품은 참으로 드물었다. 독자들을 혹독한 심판대에 올려놓고 질문하고 추궁하다가 때로는 간절히 매달려 가며 사정하는 이런 작품은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 그곳이 어디든 » 에서 잠시 들여다본 적 있는 사태, 즉 사회적 폭력이 국가적 폭력으로 공인되고 이론화되는 과정을 여실히 드러내주기도 한다. 프랑스에 소개된 이승우의 작품들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의 군사독재는 혹독한 처벌을 받는다.

이야기

외진 산속 수도원에서 벽 위에 빼곡하게 옮겨 적은 성경 구절을 발견하는 한 여행 작가가 있다. 미적 가치를 차마 매길 수도 없는 이 성경 구절들은 그 아름다움과 신앙의 표현이라는 면에서 « 켈스의 책 » 에 비유된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미 등장한 바 있으니 낯설지 않은 질병, 폐암으로 여행 작가는 이 벽서에 대해 쓰던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한 채 세상을 뜬다. 그가 죽은 뒤, 투병하는 형의 곁에 한 번도 같이 있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 동생은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작품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형제들 간의 죄의식이라는 주제를 재발견하게 된다.) 형의 유고를 출판하는 데 매진한다.

그리고 후의 이야기. 열네 살 소년 후는,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해안 초소에서 근무하는 박중위에게 겁탈 당한 사촌 누이 연희의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후는 박중위를 기다린다. 그를 칼로 찌르기 전에 어쩌면 후는 그에게서 최소한의 해명이라도 얻어내고 싶었던 걸까. 겁탈이라는 행위 자체보다, 후를 범죄 행위로 떠민 건 차라리 이런 물음들일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그토록 연희를 원했던 그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연희에게 푹 빠졌던 그가, 그렇게나 어여쁘고 순수한 연희를 한 순간에 버리게 된 건지. 열정이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하면 그토록 빨리, 바라던 육체를 손에 넣기 무섭게 사라져버릴 수가 있는 것인지. 겁탈은 연희의 삼촌, 그러니까 연희 아버지의 동생의 공모로 성사되었다. 그 일대 술집에 거미줄처럼 널려 있던 삼촌의 술빚을 죄다 갚아준 젊은 박중위에게 매수된 삼촌은 연희에게 덫을 놓는 데 가담한다. 그렇게 겁탈당한 연희는 기를 쓰고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던 박중위가 겪었던 것 못지 않은 괴로움을 겪으며 그에게 일말의 책임감이라도 느끼게 해보려 하지만 그럴수록 박중위의 마음은 도리어 차가워진다. 연희는 어쩌면 겁탈을 통해 갑자기 박중위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 걸까. 아니면 그건 겁탈이 아니라 박중위의 사랑이었다고 믿고 싶은 연희의 마음이었을까. 뭐라고 단정짓기 힘든 일이다.

작가가 애지중지하는 요소들은 이번에도 막힘 없이 등장한다. 우선 지리적 요소를 들 수 있겠다. 1970년대의 시골 마을, 당시 대부분의 한국 농촌이 그러했듯, 가난한 풍경이다. 이 마을의 산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성함의 상징이 된다. 이 작품 속의 산에는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공동체가, 아버지 없는 가족이 산꼭대기에 수도원을 짓고 살아간다. 병이 나지 않았으면 벌써 고등고시에 패스에서 법관이 되었을 법한 연희의 아버지는 일찍 절명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산속에 은신한 후는 산을 오르는 길에 몇 번이고 넘어진다. « 그곳이 어디든 »의 유 역시 노아의 동굴로 향하는 산길을 오르며 몇 차례나 넘어지곤 했다. 상승을 향한 길이란 이렇게 복병으로 뒤덮인 것.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몇 번이고 넘어지며 예수가 지나던 길의 알레고리는 아닐런지. 어쩌면 진입조차 거의 불가능한 이 산 위에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형제들의 공동체가 만든 수도원이 있고, 그곳의 형제들은 철저하게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었다. 낮 시간에 형제들은 주어진 일을 하고, 성경을 읽고 필사하며 보낸다.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한국에선 종교라는 이름 하에 과격하고 엄격한 성격의 기독교 이단들이 많이 생겨났다. 첫 번째 군사 독재 시절 (1961-1979), 권력에 도달하기 위한 군인들의 목표는 « 거리의 부랑아나 건달 세력, 그리고 부패를 척결 »하는 것이어서 수많은 범죄자들이 법망을 피하기 위해 외딴 사원에 은신하게 되었다. 장편 « 그곳이 어디든 »에 등장하는 마을 ‘서리’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다시피 한 건달 무리 역시 그런 경우이다.

피에 대한 꿈

기진맥진한 채 간신히 수도원에 도착한 후는 문 앞에 주저 앉아 잠이 든다. 꿈속에서 그는 온몸이 피로 뒤덮이고, 그가 기대었던 문은 키가 큰 거인으로 둔갑해 그를 품에 안고 안으로 데려간다. ‘통과의 장소’인 문은 안과 밖, 기지의 세상과 미지의 세상을 나누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문은 그 뒤에 몸을 감추고 있는 신비한 세상 속으로의 초대이기도 한 것이다. 빗장이 단단히 걸린 문은 정복으로의 초대이며, 열린 문은 알려지지 않은 다른 곳을 향한 도정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이 ‘통과’에는 무릇 대가가 필요한 법. 문은 죽음으로부터 생을 가르고, 성으로부터 속을 가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 문이 단순한 장애물만이 아니라면, 문 너머에 감추어진 것들을 정복하기 위해서 가진 것들을 전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금지된 천국의 문과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문 사이에서, 인간은 그 사이 공간 어딘가에서 살아가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역설적으로 문이든 대문이든, 이 전환의 공간은 다른 어떤 곳으로 향할 것을 허락해주는 고정점이 된다[2]. 수도원 문턱의 후는 신비의 문턱에 있는 셈. 그의 앞에서 길이 열리고 후가 내딛는 걸음은 이제부터 더욱 냉혹해질 것이다. 산 자들의 세상은 그에게 금지되고, 문 뒤의 세상, 죽은 자들의 것이 아닌 세상은 희망을 향해 열릴 것이다. 그 문을 지나려면 무언가 잃어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피가, 종교뿐 아니라 세속에서도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할 피가 이제 빠져 나간다.

«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3] […] 왜냐하면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4]

피가 후의 양손을 뒤덮고, 후는 부질없이 피로 얼룩진 두 손을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피가 티셔츠를, 바지를 적시고 후는 계속해서 손을 여러 번 문질러보지만, 이제는 온몸이 피로 덮인다. 닦아도, 닦을수록 더 많은 피가 흘러 넘치고, 피를 보지 않기 위해 손바닥을 얼굴에 가져가자 손바닥 모양의 피가 얼굴에 덮인다. 얼굴을 덮은 손바닥은 차후 후에게 필요해질 가면의 예고일 것이다. 후가 바닥에 무릎을 꿇자 돌연 « 그의, 피의 무게가 땅에 균열을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 »(91쪽)하게 되고, 벌어진 틈을 타고 땅 속으로 스며드는 피를 후는 막을 도리가 없다.

이승우의 작품에 등장하는 꿈들은 언제나 매장과 연결어 특수한 의미를 낳는다. « 식물들의 사생활 » [5]의 기현은 나무 뿌리가 자라는 지하 세계를 생각하고, « 한낮의 시선 »의 한 청년은 삼촌의 시체를 땅에 파묻는다. « 그곳이 어디든 »의 어머니는 꿈 속에서 모래 무덤 속에 빠진 어떤 남자를 만난다. 땅 속으로 사라지는 것, 고통이나 근심으로 괴로울 때마다 우리는 어머니의 땅 속으로 들어간다. 존재의 휴식과 내면이란 우리 시야에서 사라질 때 가장 완벽한 법.[6] 후는 옷을 벗고 갈라진 틈을 메우려 애써보지만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다. 틈은 점점 더 벌어져 급기야 그를 뒤덮은 피를 전부 집어삼킬 정도가 된다. 땅속까지 흐르는, « 식물들의 사생활 »과 « 그곳이 어디든 »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 매장의 욕망과도 같은 피. 사라졌다가 비기질성 상태로 되돌아오려는 욕망은 외부의 위험에 맞서려는 주체의 저항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죽음 충동은 죽음을 향한 욕망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모성적 상징을 통해 근원적 모태로의 회귀, 최초의 시간, 시간이 없는 시간, 다시 말해 영원으로의 회기를 가리킨다고 봐야 할 것이다. 후는 박중위의 피가 흐르는 과거를 떠나, 앞으로 다가올 삶을 지켜줄 옷을 걸쳐야 한다. 대문과 연희의 처녀성에 대한 연결 역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능욕과 겁탈의 피가 흐르기 전. 박중위의 피와 연희의 피가 결합하여, 쓰러진-사실은 잠든- 후가 빚어내는 이미지와 다시 하나가 된다. « 닦으면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것 같았다. »(91쪽) « 기다렸다는 듯 »(91쪽)이라는 표현은 물론 사촌 누이를 향해 후가 품었던 욕망을 고백하는 시간에 대한 기다림일 터. 처녀막이라는 문은 사춘기 소년의 생에서 성인의 생으로의 ‘통과의례’이다. 능욕은 근친상간의 사랑으로 향하는 후가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이다. 후는 말 그대로 네거리 한복판에 서 있다.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살인자라는 새로운 길에 들어가지 못한 후는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자신의 사랑과 욕망을 고해하며 어른의 삶 속으로 그렇게 들어간다.

꿈속에서 완강하게 닫혀 있던 문이 살며시 열리고(형제가 그를 구하러 오는 장면) 후를 품에 안는다.(같은 형제가 그를 안아 들고 수도원 안으로 데려가는 장면.) 후가 간절히 소망하던 보호 속에 몸을 맡기는 행위는 형제애와 여성에게 몸을 던지는 행위를 한 데 뭉쳐 보여준다. 박중위가 흘린 피, 그리고 능욕당한 연희가 흘린 피와 함께 이제 후에게는 기억의 피가 흘러 넘친다. 새로운 삶에 대한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서 이제는 « 그의 피를 비워내야 »하고, 바로 여기서 남성의 피가 여성의 대지 속으로 들어간다. 피에 대한 또 다른 꿈이 이번엔 제단에 바친 암송아지의 상징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그 나머지는 희생과 물로 덮인 재가 있은 후 전부 불태워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불이 고의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다시 소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민수기 19장 2절에는 저 높은 존재에게 « 내일은 없다. »라고 말하게 하는 붉은 암송아지가 등장한다. 기둥과 문에 피 칠갑을 하고 난 그가 덧붙인다. «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

후는 약속의 땅을 찾았다.

우리가 지금부터 목격하게 되는 것은 후의 재생이다. 피를 다 비워낸 후는 수도원의 아주 작은 방에 머물게 된다. « 방이라기보다 굴 같고 굴이라기보다 관 같 »(98쪽)아 한 명 이상은 머물 수 없는 협소한 방. 작가 이승우에게 협소한 공간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안전성, 부동성의 조건과도 같은 협소함. 둔황 동굴이나 쿰란 동굴, « 그곳이 어디든 » 속 노아의 돌집이 이쯤 될까. 인간이란 모든 공간을 다 누리며 살 수 없는 법이며, 그것을 두고 으스대는 것은 하물며 안 되는 법. 몸이라는 자기만의 규격을 타고난 인간은 협소한 장소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는 영원히, 자신의 인간적 야망에 대항해서 영원히 그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신에 대한 도전이란 이런 것이다. 공간의 협소함은 검소한 식사와 낮 기도로 이어진다. 매일, 그들은 후에게 성경을 읽고 영적 지도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경 구절을 필사하게 한다. 이 공동체는, 여기서도 또 그렇듯이 속세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쿰란 동굴 속에서 성경을 필사하며 살았던 에세니엔들을 환기한다. 과묵하고 외롭고 은둔하며 오로지 한 가지 목적에만, « 그곳이 어디든 »의 노아나 이 작품 속 후가 좇는 것에만 간절히 매달리는 공동체. 후가 있는 수도원은 헤브론 성이라 불린다. 성경 속에서 예루살렘 근방 한때 은신처로 등장하는 그곳.

«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 [7]

후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담은 텍스트를 읽는다. « 그 음성이 핏줄과 신경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 »을 느끼기 위해. « 성경 속 하나님의 말씀이 섭취되고 흡수되고 소화되도록 » 하기 위해 도무지 무엇을 하는지 감을 잡지도 못하면서 후는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고행을 계속 겪어 나간다. 입술을 놀리고 몸을 흔들고 머리를 벽에 기대어보지만 후에게 확신은 아직 찾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날이 멀지 않았고 그날이 오면 하늘 집의 형제자매들 모두 하늘로 올라간다는 믿음은 후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믿어지지 않았다기 보다 «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인지,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인지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100쪽)

«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잃어버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면, 신이 존재한다면, 그를 믿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전부 잃게 될 것이다 »[8] 라는 « 파스칼의 내기 » 대로라면, 후는 믿는 것도 아니면서 첫 번째 명령 « 너는 절대 살인하지 말지어다 »에 불복하기 위해 온순하게 성경을 배우기 시작한다. 성서 읽기는 후로 하여금 « 여태 자기 손에 묻은 피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칼을 쥐고 휘두르고 찌른 행동이 문제가 아니었다 »(112쪽)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렇게 후는 은연중에 복수의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차차 깨달아 간다. 그것은 연희를 향한 그의 욕망, 그를 두렵게 한, 이 소설의 이 공간에서 그가 공공연하게 고백할 수 없는 욕망이었다. 연희를 되찾아라, 그런 정언적 명령이 아니라면, 가설적 명령으로라도. 후가 누이를 찾아내고 만다면 는다면 이 명령은 뭐가 될까. 탐색은 그것이 현재 진행형일 때만 의미가 있다. 만일 탐색의 대상을 이미 찾아낸 거라면 찾고 있는 주체는 뭐가 된다는 말인가? 여기서 화자가 한 마디를 보탠다. « 우리는 후를 의심할 이유가 없다. » (115쪽)라고.

화자가 빌려온 성경 속 에피소드가 후의 처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9] 압살롬의 이복 형 암논이 은밀히 사랑한 아름답고 순수한 다말. 다윗 왕의 아들 암논이 제안한 음모로, 다말은 암논에게 겁탈 당한다. 이복 누이와 결혼할 수 없는 후-압살롬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 딸을 낳고 다말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이복 누이에게 품었던 사랑은 이렇게 대물림 되고 암논과 마찬가지로 후 역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95쪽) 암논은 자기 사랑을 당연한 권리처럼 내민다. 물론 이 부분에서 우리는 « 생의 이면 »과 « 식물들의 사생활 »에 등장하는 불가능한 사랑을 떠올린다.

욕망의 재탄생

후가 망각과 기억에 대해 배우게 될 곳은 바로 여기, 악을,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깥 세상을 지배하는 악에 무지한 평화로운 공동체 안에서이다. 자신이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범죄를 « 영혼의 거울 »인 성경을 읽으며 잊기, 그리고 사촌 누이, 연희를 향한 욕망을 다시 소생시키기. 연희의 부재에 자극 받아 « 인식의 근거가 된다 » (87쪽) 고 화자가 말하는 설명할 수 없는 부재에 의해 태어나는 그의 욕망. 욕망에 대한 그의 인식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견딜 수 없는 것이다. « 끈질긴 » 이 욕망과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에 대한 느릿한 인식. 그것은 성욕뿐 아니라 사랑의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사랑에 대한 욕망과 성욕 사이에서 모호함이 태어난다. 물론, 누이를 돌보기보다 누이로부터 보살핌을 받기 위해 그녀를 찾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고백하긴 하지만, 이 같은 이성적 시도는 인정하기 어려운 욕망의 힘 앞에서 금세 사라진다. 그럼에도 후는 이렇게 단언하지 않는가.  « 운명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다 » (9쪽)라고.

재생이 반드시 필요한 후는 성경 읽기를 멈추지 않는다. 후는 이전의 생을 몽땅 비워내고 형제의 지도 아래 조그만 독방에서 다시 일어서야만 한다. 어린 후는 이렇게 한 명의 형(박중사)으로부터 또 다른 형(형제)에게로 전달된다. 박중사가 파괴의 얼굴이라면, 수도원의 형제는 복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수도원에서 후는 믿음을 배우게 될 테지만, 그의 마음이 다른 곳에 있으므로 후는 3년 후 이곳에서 쫓겨나게 된다. « 산 아래 마음을 두고 산 위에서 살 수는 없다 »(101쪽) 이라고 « 그곳이 어디든 »에서 노아가 유에게 했던 말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승우의 작품 속에서 종종 그렇듯, 모든 이야기는 실종이나 떠남, 추방 또는 타불라 라사에서 시작된다. 마을과 가족과 아내 또는 친구들을 떠날 때 기억은 저절로 지워진다. 재생은 지난날의 잿더미 위에서만 이루어지고, 모든 흔적은 불꽃 속이나 땅속으로 사라진다. « 지상의 노래 »에서 주인공의 고향 마을은 지반 침하로 사라져버리고, 집과 주민들은 땅속에 묻히고 밭도 논도 흙더미에 빨려 들어간다. 마을 회관이 있던 한가운데엔 거대한 구멍이 움푹 파여 재앙을 증명하고 있다. 불은 물과 다르게 파괴하고 정화한다. 물은 뒤덮고 집어삼키지만 씻어주기도 한다. 파묻어 변화를 일으키는 땅이 그러하듯이.

이 이름 없는 마을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먼 옛날, 타락한 마을 소돔과 고모라가 불길에 휩싸였듯 신의 말씀을 듣지 않기 위해, 신의 길로부터 떨어져 있기 위해 마을은 사라지고, 그와 함께 악도 사라진다. « 그곳이 어디든 »의 서리 마을이 여기에 해당하며, « 지상의 노래 »에서는 이 마을이 그렇다. 성경 속에서 지진과 지반 침하는 신의 현현으로서 등장한다. (마태복음). 인간과 그들의 집은 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귀머거리처럼 암흑 속으로 모습을 감춘다. 여기에서 어쩌면 우리는 경제적 발전에만 그칠 게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발달시키는 데는 실패한 군사 정권을 읽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이 마을에는 너무나 많은 욕망이 잠자고 있었다. 연희에게로 향하는 젊은 군인의 욕망과 후의 그것. 칼의 상징이 차마 제거하지 못한 에로틱한 욕망 위로 복수의 욕망이 중첩된다. 에로틱의 발현이 지속적인 죄책감과 함께 후의 의식 속으로 서서히 스며든다. 새마을 또는 옛마을, 욕망 아래 새로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죽이고 거짓말을 하고 예전처럼 사랑할 뿐이다. 그리고 예전처럼 극빈자들은 생존 전략에 반대하고 박중위 같은 상류층은 그 어떤 비열한 행위를 저지른다 해도 멋지게 살아가는 것이다.

미메시스적 욕망[10]

박중위가 연희에게 집착하는 것은 사춘기적 기억의 반작용이다. 주일학교 여선생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그는 대범하게 자기 마음을 고백했지만 그 여선생은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쥐어박는 것으로 그의 사랑을 간단히 무시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그는 곧 결혼을 하는 여선생의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이 여성에게서 그는 긴 생머리의 인상을 간직하게 된다. 보들레르 역시 머리칼을 소재로 빼어난 시를 쓰지 않았던가.

이 머리칼 속에 잠든 추억들,

나는 허공의 손수건처럼 그대의 머리칼을 흔들고 싶네.[11] 

이 관능적인 몽상을 통해 보들레르의 여행이 시작되고, 사랑 받는 이의 머리칼은 시인으로 하여금 이국으로 발길을 돌리게 한다. 사실 머리칼에 대한 찬사는 19세기 프랑스 문학 전반에서 도드라진다. « 여성 자체보다 더 눈에 뜨이는 » 이 관능의 모티프는 남성 판타지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 그때 이후 긴 생머리는 여성에 대한 그의 환상 가운데 거의 유일한 것이 되었다. » (47쪽) « 여자의 머리카락은〔…〕어떤 의미에서는 얼굴이나 팔보다 더욱 여자의 몸이었다. »(240쪽) 라고 박중위는 기억하고 있다.

시간은 열정을 되살려 마음껏,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열정을 가지고 논다. 이미 겪어버린 현재는 과거로의 회기이다. 모든 감정은 지나간 감정들을 되살아나게 하고 뜻하지 않은 장애물을 드러내며 사회적 상호작용의 정상적인 흐름을 교란시킨다. 박중사의 열정은 연희의 거절이 지속될수록 점점 더 부풀어올라, « 부재를 향해 팽팽히 당겨진다.» [12] 

후로 하여금 사촌 누이를 향한 욕망을 허락해주는 것 또한 연희의 부재이다. 젊은 중사가 그토록 갖고 싶어하는 연희를 후 또한 갈망한다. 이렇게 우리는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을 재발견한다. 연희의 거절로 인해 다시 불 붙은 열정은 중사가 이성을 잃어버릴 때까지 증폭된다. 연희는 이제 성경학교 여선생의 대체물 신세가 되고 중사는 열정과 사랑을 혼동하기에 이른다. 자기 자신에게로만 되돌아올 뿐인 열정이란 사랑의 착각인 법. 열정은 자기로의 회기로서만 기능한다. 열정은 모든 생에서 주체가 되찾으려 애쓰는 지나간 열정에 대한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다. 우리가 진실한 사랑은 서로 만나기보다 서로 잃어버리는 법이며, 요구하는 것보다 획득하는 것이며, 갖는 것보다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박중사의 열정은 사랑의 상징으로 연희가 어느 만큼이나 이용되었는지에 대한 방증이 된다. 연희는 상징일 뿐, 사랑의 주체가 아닌 것이다. 그토록 갈망하던 것을 완력으로 얻게 되자마자 이 상징은 이전에 잃어버린 사랑의 기억을 손에 닿지 않은 채로 고스란히 간직하기 위해 사라져주지 않으면 안 된다. 긴장감도, 경쟁자도 없는 박중사의 욕망은 이제 소멸되는 것이다. 연희가 성경학교 여선생의 기억을 소환하는 한, 그녀는 박중사의 욕망을 최고선까지 끌어올려줄 수 있었다. 완력에 눌려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기 무섭게 그녀를 매개로 삼았던 과거 소환 능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연희가 재현하던 상징도 파괴된다. 연희는 그녀를 종내 « 창녀 » 취급하고 만 젊은 중사의 복수의 욕망을 위한 지지대에 지나지 않았다. 겁탈자의 위선을 위해 이보다 더 완벽한 논리는 없다. « 돈으로 » 품에 안은 여자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는다고 박중사는 다짐한다. 여기 또 다른 위선. 읍내 술집에 깔린 술값을 전부 대신 갚아주는 대가로 그 치명적인 약속을 만들어낸 연희 삼촌의 위선 또한 환기된다.

독재자의 시대

멕시코 영화 감독 이냐리투가 언뜻 보기에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이야기가 돌연 서로 만나고 엮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는 방식의 영화를 만들듯 우리는 이 작품의 한쪽 어귀에서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한 시대를 발견한다. 1970년대 도시와 농촌 간 불균형 해소를 위해 박정희가 추진한 ‘새마을 운동’을 우리는 이 작품 « 지상의 노래 »에서 재발견 한다. 농촌 근대화를 목표로 한 이 운동은 근대화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농촌의 건달 세력들을 와해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박정희를 지지해줄 참여 집단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새마을 운동’ 캠페인은 전례 없는 이데올로기 개혁 작업으로 국민을 향한 사회의 통제 기능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지상의 노래 »는 ‘장군’(소설 속에도 이렇게 명명된다.)이 반정부 시위에 맞설 목적으로 제정된 계엄령을 반포하며 독재에 박차를 가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 쿠데타 가담자 중 한 사람, 장군의 충실한 그림자와도 같았던 한정효는 국민들이 더 이상 유보하고 참고 억눌리지 않을 거라고, 독재를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고 장군에게 제안하지만, 반론에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린다 해도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킬 사람이 한정효라고 생각했던 장군은 한정효를 천산 수도원에 가두게 한다. 천산 수도원이란 어린 시절의 후가 은신했던 바로 그곳. 감옥이었던 이곳에서 한정효는 개종한다. 불과 얼마 전 암으로 아내를 잃은 한정효는 이제 선글라스를 벗는다. 박정희를 비롯하여 쿠데타의 주역들은 해가 있으나 없으나 ‘라이방’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흔히 만나기 어려웠던 이 검정 라이방 선글라스는 점차 미국화 되어가는 한국의 모습을 가시화한다. 햇빛이 있을 때가 없을 때나 가리지 않고 쓰고 있는 검정 선글라스는 보이지 않고도 볼 수 있게 해주는 장치가 된다. 권력의 상징, 군사 조직, 의지, 그리고 폭력이 만들어낸 흔적으로서의 검정 선글라스는 그것을 쓰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을 환기하며 그를 통해 두려움을 생산한다. 아내가 그에게 이 선글라스를 선물했을 때, 한장교는 « 그것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 »이었다는 사실을, « 눈빛을 감추면 거리낄 것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162쪽) 깨닫는다.

한장교의 개종은 아내가 암으로 죽는 순간 찾아온다. 세상을 뜨기 전, 아내는 그에게 성경을 건네며 가급적 자주 읽을 것을 당부했다. 아내의 말을 따르긴 해도 종교에 대한 의구심은 줄어들지 않는다. 후 역시 이 단계를 거쳤다. 정책의 변화가 필요했던 장군이 그에게서 선글라스를 벗겨낸다 해도 한장교는 그를 막아낼 도리가 없다. 일개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저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다만 장군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당신이 원하는 경우에만 존재하겠습니다. » « 오직 당신이 위대하게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168쪽)라고. 화자는 지체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 절대 권력에 대한 종교적 헌신의 상징성을 감안하면 그것은 일종의 개종이라고 할 수 있다. »(166쪽)

한장교는 군복을 벗지만 선글라스는 벗지 않는다. 변신은 불완전하지만, 이로써 버림의 단초는 마련된 셈이다. 선글라스를 벗을 때 비로소 그는 아내의 죽음이 얼마나 정당하지 않은 일이었는지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구원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보이지 않고 보게 해주는 그의 선글라스는 그의 앞에 놓인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안경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나 오랫동안 아내와 아내가 내색하는 욕망에 대해 무심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내면 깊은 곳마저 건드리는 현실. 아내의 죽음에 망연자실한 그가 그토록 신실했던 아내의 생명을 지켜주지 않은 하나님을 비난하는 바로 그 순간, 한정효는 비로소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 그가 원한 것은 성경책 속의 내용이 아니라 물질로서 한 권의 책이었 »(178쪽)으므로.

« 장군이 하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폭로를 할 수 »(172쪽) 있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한정효는 천산 수도원에 갇히고, 군인들로부터 24시간 감시를 받지만, 도망칠 마음이 조금도 없는 한정효는 수도원의 수도사처럼 살아간다. 1979년, 장군이 암살당하고 그의 심복 중 한 사람이 권력을 이어받고, 새로운 장군은 수도원을 소탕함으로써 한정효를 제압하고 싶어한다. 한정효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장’, 한때 그의 상사였던 ‘장’은 군인들이 천산에 들이닥쳐 기도원을 폐허로 만들기 직전 한정효의 도피를 돕는다. 기도원 형제들의 대다수는 중국 둔황 굴처럼 너무나 비좁은 지하 방안에 산 채로 갇히고 군인들은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시멘트로 막아버린다. 성스런 경전을 품은 관보다도 더 좁은 방이었다.

이동, 계속해서.

떠남, 추방, 결코 한 곳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의지는 이승우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처음으로 이 주제는 로드 노블(road-novel)의 형식을 빌려 서로 전혀 닮지 않은 두 인물을 통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지반 침하로 부모와 집을 모두 잃고, 수도원에서 마저 쫓겨난 후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연희를 되찾겠다는 그의 욕망은 서서히 강박으로 바뀌어 이제 가장 광적인 산책으로 이어질 것이다. 어느 미장원에선가 일하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 연희를 찾아내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후는 이제 전국의 미장원을 찾아 헤맨다. 사막에서 바늘을 찾듯 후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물을 찾아 걷고 또 걷는다. 전국의 미장원을 기계적으로 찾아 헤매는 과정은 헤라클레스의 열두 시련과 다를 바가 없다.

서울에 도착한 후에게 그의 삶을 또 다른 방향으로 틀어줄 기회가 찾아온다. 서울에서도 가장 큰 헤어숍에 취직한 그는 군사 정권의 중앙정보부 직원을 남편으로 둔 ‘사모님’의 젊은 애인이 된다. 헤어숍이 날로 번창하면서 여자들의 머리를 매만지는 남자 미용사가 생겨나고 전신을 마사지해주는 뷰티숍 서비스도 탄생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 앞에 또 다른 독재, 즉 외모의 독재가 등장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상류층 사모님의 욕구 충족이라는 임무를 맡은 후는 간접적으로 얻어진 사회적 위치가 얼마나 유리한 것인지 새삼 알게 된다. 사모님의 머리를 손질하며 여성의 머리를 매만질 때의 쾌락을 재발견하고, 사모님의 요구에 맞추어 그녀의 온몸을 마사지하며, 사랑 없는 사랑에 몸을 맡긴다. 쾌락을 여전히 알지 못한 채 사모님의 친절을 누리면서도 연희를 찾아내겠다는 유일무이의 목적을 놓치지 않는 후는 이 갑작스런 변화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한 채 꿈결처럼 살고 있을 뿐이다. 후의 «서비스 »에 대한 포상으로 사모님은 후의 손에 연희가 일하고 있는 미장원 주소를 쥐어주고 마침내 연희를 찾아내지만, 두 사람의 재회는 후가 그토록 바라던 모습과는 멀었다. 삼촌과 박중사가 서로의 가면을 번갈아 바꾸어 쓰며 자신을 겁탈하는 악몽에 규칙적으로 시달리는 연희는 술과 절망에 빠져 있었다. 박중사와 삼촌의 가면은 군인들이 쓰던 선글라스의 이미지와 이어지며 연희에 대한 배신의 상징이 된다. 신화 속에서 가면은 그것을 쓰는 이들의 정체성을 감추고 은밀함 속에서 진행되는 모든 종류의 판타지를 허락하는 도구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 역시 « 보이지 않고도 보는 » 상황. 하지만 진짜 얼굴을 드러냄으로써 가면들은 애초의 기능을 상실하고, 우리는 여기서 이미 알려진 얼굴에 쓰는 가면이란 알려지지 않은 육체를 감추기 위한 거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유희를 명령하는 자의 육체. 트라우마를 실은 꿈들, 에로틱한 꿈들, 후의 출현이 이 모든 꿈들을 다시 꾸게 한다. 사촌 누이를 향해 후가 품은 복잡한 욕망은 사촌 동생을 향한 연희의 어수선한 욕망과 대칭 구도를 이룬다. 다시 시작된 악몽 속에서 후의 가면이 삼촌과 박중사의 가면 위로 중첩되고, 후는 욕망의 억압 기제가 됨과 동시에 연희가 후에게 느끼는 진정한 욕망의 지표가 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욕망을 거절함으로써. 연희를 향해 후가 느끼는 욕망이 두 사람 모두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인식한 후는 그렇게 사촌 누이를 떠난다.

십자가 길

다시 순례. 그렇지만 후의 열정은 점점 고조된다. 프랑스어에서 그 어원을 따지자면 « 고통 »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단어 열정은 이미 앞서 겪은 사건들로 무너진 후의 심리적 균형을 더욱 헝클어뜨린다. 이미 사춘기를 훌쩍 넘긴 청년 후에게 찾아온 새로운 감정을 후는 그것이 근친상간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사촌 누이에게 품고 있다. 주체를 괴롭히는 것은 상상이라고 철학자는 말한다. 후는 사건의 주인도 시간의 주인도 되지 못한다. 욕망의 포로가 되어버린 후는 끊임없이 이전 상태로의 복원을 소망하며, 자기 삶을 지배하는 열정을 알아채고 유일한 대상을 향해 모든 충동을 데려간다. 이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후가 꾸는 에로틱한 꿈이다. 성행위가 절정에 다다를 때 사모님의 얼굴 위로 중첩되는 건 바로 연희의 얼굴. 하지만 후의 얼굴은 가면에 가려져 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가면, 하지만 얼굴이 알려질까 두려워 감히 벗어 던질 수는 없는 가면. 가면을 벗는 날, 후는 두 손으로 맨 얼굴을 만지게 될 것이다. 나르시스는 이렇게 정점에 오를 것이다. 자기 맨 얼굴을 모르는 이상, 나르시스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맨 얼굴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그의 생도 끝난다. 정신분석학은 이렇듯 열정의 목표는 유년의 감동들을 복원하는 데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열정이란 기억에 의존하는 법이므로 이 복원 동작은 개인의 자유를 위반한다. 이렇게 후는 연희를 되찾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이전의 상태, 그의 유년, 기억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의 희미한 의존 상태를 탐구해 나간다. 후는 사랑의 신성불가침한 조건인 전망과 앞날을 추구하지 않는다. 후가 추구하는 것은 시간 이전의 시간. 사르트르가 단언했듯, 우리의 모든 생이 실패의 이야기라면, 후의 전망이란 실패 이전의 시간,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는, 태어나지도 않은 처녀의 상태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

이런 후를 우리는 에로틱한 욕망의 범주 속으로만 환원시킬 수가 없다. 욕망의 가장 섬세한 형태인 불가능에 대한 갈망. 후는 자신이 실패를 향해 달려간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열정은 통찰력을 완전히 차단할 수가 없다. 열정과 통찰력 사이의 다툼 속에서 후가 추구하는 것은 존재의 힘이다. 오직 타자의 출현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존재의 힘. 종종 열정은 미끼가 된다. 남 몰래 갈망하거나 갈망되는 것은 타자인 것. 타자가 없다면 스스로를 정의할 수도, 스스로를 알 수도 없다. 후가 찾아 헤매는 것은 그러므로 타자, 그에게 존재 증명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타자이다. 그리하여, 심리적 안정감, 전에 후가 수도원에서 그에게 성경 읽는 법을 가르쳐주던 형제에게서 느꼈던, 그에게 라면을 알게 해준 박중사에게서 느꼈던, 다정한 보호의 느낌과 에로틱한 욕망을 함께 느끼게 해준 연희. 그러므로 신 이외에 과연 누가 심리적 안정감(‘분리할 수 없는 불변’으로서의)과 사랑을 줄 수 있을까. 후는 자기 본성대로 (스피노자) 힘 속에서 존재하기를, 같은 시간 속으로 양도되기를 갈망한다. 욕망이 커지면, 열정은 욕망의 합체, 유일무이의 대상으로 집약되게 마련이다. 열정의 소유자는 그 열정의 극단을 향해 팽팽해진다. 그의 이해를 돕는 길이 바로 거기 놓여 있다. 그러나 후는 « 좁은 문 »을 지나쳐야 할 것이다.

« 천복(天福)의 예감이 뒤섞인 헤아릴 수 기이한 고통과 노력으로 나를 이끌던, 모종의 시련과도 같은 꿈 속에서 나는 그 좁은 문을 재현했다. » [13].

위에 몸을 올려놓기

후는 다시 길을 떠나고 그런 그를 지속적인 고통이 뒤따른다. 여행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피멍과 실패의 아주 긴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에도 기쁨은 없다. 솔잎을 모아 끼니를 때우고 마치 예전에 다윗 왕이 속죄를 위해 그랬듯, 바위 틈, 역, 땅바닥에서 잔다. 후는 속죄의 여행을 떠난다. 금지되었으나 억제할 수 없었던 욕망, 방출하지 않으면 결국 쫓겨나버리고 말 욕망을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처럼 억누르는 고통과 속죄를 통해 후는 신의 힘을 깨닫는다. « 걷기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행위 »라던 철학자 프레데리크의 한 마디를 떠올려보자. « 타인 앞에 한 발을 놓는 것만으로 족하다. […]  하지만 이는 아주 고유한, 영적인 동작이기도 하다. » [14]

비폭력적이며 지속적인 노력. 걷기는 인내와 의지, 결단력과의 싸움이다. 한번 명명된 지점에 도달해야 할 때 목표는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목표물이 발걸음 속에 녹아들 때, 우리가 걷기에서 기대할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발과 정신이 그들의 노력을 따라주지 않을 때는 어떻게 걸어야 하는 걸까? « 전쟁과 평화 »에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 움직이는 누군가는 그 움직임에 목표를 부여한다. 천 리를 가기 위해서 그는 천 리 끝에 뭔가 좋은 것을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속해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약속의 땅이 주는 희망이다.» [15]

후는 육체의 무질서 속을 걷는다. 그는 수도원 시절 배워둔 성경 구절을 읊조리며 십자가의 길을 계속 나아간다. 길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뻗어 있고, 연희를 되찾겠다는 의지가 그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여행의 본질은 후를 변화시킨다. 걸을 때, 정신은 자신의 장소를 발굴하기 위해 조급해지는 법. 그곳은 종종 가장 어두운 곳, 낮에는 아주 천천히만, 자기 의지에 의해서만 아주 드물게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바깥에서 안쪽을 향해 진행되는 변화. « 그곳이 어디든 »의 유가 외부 환경들이 그의 삶을 조건 지었다고 말했듯,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속죄를 위한 시련 형태로 다시 만난다. « 걷는 동안 찾아오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다. »라고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장장 1년 동안 걷고 또 걷다가 피곤이 절정에 달할 때, 후는 주저앉을 것이고, 누군가 그를 구해줄 것이다. 그 누군가 역시 아주 오랫동안 걸었던 사람이다. 남자는 후에게 충고한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상관없이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길 위에 몸을 올려놓아야 한다고. 장편 « 그곳이 어디든 »에 등장했던 주제와 이 작품이 재회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영원으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원의 삶이 아닌 영원, 시간의 해제. 남자는 후의 몸을 들쳐 업고 병원으로 옮기면서 로마서를 읊조린다. 천산 수도원에서 지내던 시절 후가 암송했던 로마서. 이 남자는 물론 한정효 장교다. 미지의 세상을 찾기 위해, 그리고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그 역시 길 위에 있었다.

« 낯선 세계가 목표여서가 아니라 그 세계를 통과해 도달할 회복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286쪽)

남자는 말씀이 무자비하고 막무가내의 현실 앞에서 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 길의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세상의 작용이 아주 미미하게 느껴져요. » »(292쪽)

작가 이승우의 작품 속 모든 화자가 몹시 아끼는 주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움직임이 곧 존재 자체의 조건이라는 명제일 것이다. 유, 부길, 후, 한정효 등 많은 인물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끝없이 분리된다. 그러다 마침내 어딘가 정착할 때, 불행이 멀지 않은 데서 도사리고 있다. 마침내 연희를 찾아내었으나 그것이 후에게는 오히려 실패였다. 천국에 닿으려면 오래오래 걸어야 한다. 서로 분리된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두 가지 시련이 후를 피할 수 없는 결론으로 이끈다. 후가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한 사모님은 건달 둘을 보내어 그가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으름장을 놓는다. 두 번째 시련에서, 후는 지명 수배 전단의 사진과 닮았다는 이유로 절도범이 된다. 후는 그와 쌍둥이처럼 닮은 용의자의 사진이 박힌 수배 전단지가 붙어 있는 벽과 가장 가까운 기둥 아래 비스듬히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승우의 유머감각은 이처럼 우스꽝스러운 분신술 에피소드 속에 드러난다. 주민등록증을 들이밀어보았지만 후는 연행된다. 감방에 갇히고, 심문을 받은 후는 한달 반 동안의 감금 이후 무죄가 입증 되어 풀려난다. 이전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민등록증은 혼란의 유희만 야기할 뿐 신분 증명이 되지 못한다. 주민증록증의 부재는 정체성의 상실과 동의어가 되고 주민등록증은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주민등록증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이 두 가지 에피소드 속에서 처벌은 동일하다. 연희에게도, 사모님에게도, 심지어 길 위에서도 후를 위한 자리는 없다. 골고타는 아직 멀기만 한 것이다.

후에게 남은 건 예전에 박중위를 죽였다고 생각했던 천산뿐. 시골 출신의 순수한 사춘기 소년, 젊은 기둥 서방 후는 한때 독재자의 오른팔이었으나 아내의 때 이른 죽음으로 성경으로 귀의한 한정효 장교가 밟았던 길을 평행이론처럼 따라간다. 두 사람 모두, 심상치 않은 상황과 함께 천산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한정효는 죽어가고, 그의 마지막 순간을 후가 지킨다. 과오를 속죄하며 죽어가는 이에게서 우리는 « 식물들의 사생활 » 속, 그리고 « 그곳이 어디든 » 속 인물들과 재회한다. 죽기 직전의 한정효는 수도원 벽면을 성경 글귀로 빼곡히 채웠다. 질병으로 중단된 그의 작업을 이제는 후가 이어받는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되자 후는 흙 밖으로 머리만 내민 채 스스로의 몸을 파묻는다. 그 육체, 그에게 숱한 괴로움을 주던 육체는 이제 매장되고, 억압되며 영원히 시야에서 사라지지만, 필시 하나님의 날을 기다리고 있을 머리만이 유일하게 세상에 남겨진다. « 당황하는 사람들(Les Désarçonnés) »에서 파스칼 키나르는 이렇게 말했다. « 전 생에 걸쳐 우리는 근원의 장소를 찾아다닌다. 내가 부재하고 육체가 잊혀지는 그런 공간을. »

« 지상의 노래 »는 어쩌면 복잡하게 쌓이고 얽힌 것들을 비워내는 소설인지도 모르겠다. 덜어내기의 소설. 피할 수 없는 것을 향한 걷기. 상실에서가 아니라 꽉 차서 방해가 되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무게를 덜어내기. 후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만 여겨졌던, 그러나 착각에 불과했던 수많은 짐들을 하나하나 내려놓는다. 소비재, 사물, 감정, 볼거리, 다양한 허영심 등 축적과 행복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며 언제나 우리 삶을 더 무겁게만 만드는 우리의 모습과 달리, 후는 길을 한없이 걸으며 무게를 덜어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스스로 가벼워져야 한다는 걸 후는 알고 있다. 발걸음이 후를 시간 없는 시간으로 이끈다. 비기질성으로의 회기, 삶 이전의 삶으로. 박중사의 욕망에 의해 활성화되었던 후의 욕망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긴장과 압력이 되었더랬다. 부모의 죽음과 연희의 실종이 만들어낸 트라우마는 후를,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고독과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번뇌, 그리고 자기 보존의 욕망(다행히 후는 모든 시련을 이겨낸다.)과 몽환적 동작들에 의해 끝없이 승화되는 에로틱한 충동과 충돌하게 했다.

그 ‘서글픈 열정’을 후는 이해하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그가 알지 못하는 외부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정적인 존재 속에서’ 집요하게 지속되는 것은 막다른 골목일 뿐이라는 것을 후는 아주 천천히 깨닫는다. 이성은 아무런 힘이 없고 오직 순례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다. 연희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확고부동의 목적 속에서 후가 걸어나가는 길은 이제 목적 없는 탐색으로 변화한다. 서서히 다가올 피할 수 없는 결말을 좀더 받아들이기 위해 후는 자신을 내맡긴다. « 느림과 기억, 속도와 망각 사이엔 은밀한 연결점이 있다. » [16]라고 쿤데라가 말하지 않았던가. 후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후는 존재하기 위해 기억해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잊어야만 했다. 행복주의와는 멀어도 한참 먼 후는 자기 욕망을 길들이기 위해 온갖 계율들을 실천해나갔다. 그는 한없이 걸었으며 한없이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조절할 수 없는 공포로부터 벗어나면서, 수도원 형제들이 그랬듯, « 그곳이 어디든 »의 유가 그랬듯, 후는 이렇게 자기 상실로 뻗어나가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난다.

글 장-클로드 드 크레센조[17]

번역 이현희[18]


[1] 우리의 경험 세계 저편의 이상 세계.

[2] 멀치아 엘리아데, 성과 속, 갈리마르, 1965

[3] 히브리서 9장 22절

[4] 레위기17:11

[5] «식물들의 사생활», 2000, 문학동네 ;La vie rêvée des plantes, Choi Mikyung, Jean-Noël Juttet 불역, 2006, Zulma.

[6] 가스통 바슐라르,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참고. 조제 코르티 출판사, 1948년.

[7] 여호수아 20장 5절.

[8] 블레즈 파스칼, 내기, 갈리마르, 1936

[9] 사무엘, 13장 1절.

[10]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그라세와 파스켈, 1961.

[11] 샤를 보들레르, 머리칼, « 악의 꽃 », 1857.

[12] 페르낭 알키에, 영원의 욕망(Le désir d’éternité), PUF, 1943.

[13] 앙드레 지드의 소설 « 좁은문 »에서 알리사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촌 제롬이 하나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자발적으로 일합니다. 알리사는 의도적으로 야위며 파리해진다. 앙드레 지드, 좁은 문, 메르퀴르 드 프랑스, 파리, 1959

[14] 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Marcher, une philosophie), 카르네 노르, 2009

[15] 엘리자벳 괴르틱 역, 포슈, 파리, 2010

[16] 밀란 쿤데라, 느림, 갈리마르, 파리, 1995.

[17] 프랑스 엑스마르세유 대학교 한국학 주임교수, 아시아학 연구소(IRASIA) 연구원, 한국 문학 전문 웹진 « 글마당 » 대표, 한국문학 전문 출판사 드크레센조 설립.

[18] 프랑스 부르고뉴-프랑슈콩테 대학교 비교문학 전공 박사 과정. 문학 번역가. « 그녀, 아델 » «세상의 마지막 밤» 등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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