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의 이면 »에 부쳐
Article paru dans la revue en ligne de la Fondation Daesan, 2019
이 책은 우리에게 사르트르가 던진 질문, 그리고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답변을 모색했던 질문 : 문학의 쓸모는 무엇인가 ?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답변은 오히려 간단할 것이다. 문학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카를로 이솔라가 « 우리 근원의 미래(L’Avenir de nos origines) »[1]에서 단언했듯, « 문학의 효용은 고독의 노래처럼 번져 나가는 데 있다.» 여기에 나는 기꺼이 한 가지 대답을 더하고 싶다. 문학의 효용은 우리 자신을 기억하는 데 있다. 어쩌면 문학은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느리고 지난한 과정일런지도 모르겠다. 피에르 상소[2]의 말처럼 « 우리의 온 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 문학은 쓰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문학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정의란 것들은 전부 방어적이고 흐물거리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축소될 뿐인데, 도대체 한 작가의 « 문학적 프로젝트 »란 게 또 무슨 효용이 있단 말인가? 만일 문학이 아무 효용 없는 거라면, 미래에 대한 예측은 과연 필요한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예측이란 곧 기획이나 계획의 다른 말이 아니던가. 그리고 만일 모든 예측이 금지된 것이라면, 가령 프랑스 작가들의 경우 발자크나 루소가 말하는 문학적 프로젝트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프로젝트라는 것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 없이 주어지는 걸까. 작가가 알지 못하는 프로젝트라는 게 있을 수 있나? 육안으로 확인되는 프로젝트가 있으려면 일관성 있는, 아니면 적어도 설득력 있는 작품이 있어야 한다. 샤를 모롱이 자신의 첫 번째 정신분석 비평서에서 이미 제안했듯[3], 고정된 연관성들의 네트워크와 작가의 다소 무의식적인 이미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해당 작가의 여러 텍스트들을 통해 흔적을 추적하는 작업이 필요해진다.
시간이 흐를 수록 « 생의 이면 »은 스스로는 그렇게 인정하지 않지만, 문학 프로젝트의 원형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책은 의식도 의도도 없이 작가에게 주어진 것 같다. 독자 역시,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모티프, 생각의 연쇄들, 꿈이 가진 두 겹의 의미, 생각의 고착 등을 마치 덤불 숲 속을 헤매듯 헤쳐 나가다가 언제부턴가 이 작품에 한껏 매료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보물찾기와는 또 다른 형태의 행복이란 게 있는 법이다.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낼 때마다 우리는 수수께끼의 발견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지만, 그것이 오히려 행복한 것이다. 이승우의 작품이 바로 그런 행복을 지녔다. 그의 작품들 중 프랑스에서는 처음으로 출간된 « 생의 이면 »에 대한 첫인상은 물론 원숙한 고민과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작품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출간된, 다시 말해 프랑스에서는 전혀 이름 없는 어떤 한국 작가의 소설이다. 작가의 내밀한 고백이라는 소설의 모양새가 문학 독자들에게 매혹적인 요소가 되었음은 부인하지 않겠다. 6년 뒤, « 식물들의 사생활 »이 서점가의 성공을 거두면서 이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긴 하였으나, 작가의 책 한 권 한 권이 증명하는 총체적 프로젝트, 하나의 작품 세계로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시 6년이 흘러 2012년 « 그곳이 어디든 »이 출간되었고,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작가의 한 편의 소설과 다른 소설을 연결시켜주는 어떤 힘있는 선이 완성으로 향해 가는 하나의 ‘작품œuvre’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그 선을 보지 못한 채 실명(失明) 상태로 있거나, 선 뒤에 은폐된 것의 성공을 치하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른 책들이 출판되면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주제들은 더 선명해지고, 반복되고,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정점들이 하나 둘 노출되면서, 틈이 벌어진 단층들은 이제 육안으로 확인 가능해졌다. 여세를 몰아 출간된 « 한낮의 시선 »과 « 지상의 노래 »는 우리 앞에 놓인 것이 정녕 매 출간마다 점점 나아지고 있는 하나의 프로젝트, 하나의 작품세계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문학 작품이 곧 문학적 프로젝트가 되는 건 아니라고 누가 말했나. 작가 이승우에게는 의도에서, 타인과의 소통을 향한 의지에서 기인한 프로젝트라는 게 없다. 어쨌든 우리 눈에 그는 그렇게 보인다. 프로젝트는 작가인 그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고 주어지는 것이다. 다른 소설가들의 경우 주제가 작품마다 달라진다고 한다면, 이승우의 작품에서 우리는 위치를 가늠할 수 있고, 변화 무쌍한 상황이라도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영원한 주제의 출현을 목도한다. 그러므로 그 작품 세계라는 것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일종의 잠복상태였음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번번이 갔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 생의 이면 »에서부터 작품 세계의 뼈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너무 일찍 사라진 아버지, 타인들로부터의 거부, 그리고 사회의 일면, 추방, 어딘가에 절대로 매이지 않겠다는 욕망과 의지, 은신처와 같이 비좁고 어두운 공간들, 고독의 지표로서의 책 읽기, 집착하는 사랑과 거기에 수반되는 폭력성, 신과의 관계, 덧없는 세상과 영원한 다른 세계의 주제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각각 다른 소설 작품들 속에서 발전해 나갔다.
작가가 된다는 것, 그것은 발음하기도, 글로 적기도 결코 쉽지 않은 불어 동사 « œuvrer »에 행위를 부여하는 일이다. 일하다, 또는 움직이다 라고 억지로 번역할 수 있을 뿐, 이 동사에 딱 들어맞는 한국어 동사는 모름지기 찾기 어렵다. 불어 사전은 Œuvrer 동사를 « 중요한 어떤 일을 실현하기 위해 일하는 것, 중요한 어떤 것을 얻어내기 위해 실행을 감행하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Oeuvrer는 본질적으로 건축적 의지 행위이며, 어떤 것을 향한 육체의 긴장 상태이다. 도달하지 못한다면 깊숙한 고뇌 속으로 우리를 침잠시키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솜씨 좋게 유도하는 충동의 의도적 긴장 상태. Œuvrer, 그것은 실제 세계에 합류하라고 환상을 향해 내리는 명령이다. Œuvrer,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짓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도구들을 허공에서 강탈하려는 의지이다. 그것은 우리 기억들의 벌어진 틈새 속에서 이미 길들여진 말들이 끝없이 뿜어내는 분출물들을 길어 올리는 행위다. 틈새가 가리키는 것들에 주목하면서 우리는 글을 쓴다. 틈새는 벌어진 것, 열린 것. 그것은 거기에 어떤 이름이나 단어를 올리는 것조차 헛된 일에 지나지 않는 원초적 상처이다. 틈새는 우리가 다나이데스의 물통[4]이라 부르는,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곳에 머문다. 다나이데스의 물통은 채울수록 점점 더 비워진다. 모든 개인이 살고 있는 틈을 채우려 노력하는 것은 부질 없다. 한번 더 말하지만, 채워지는 것은 빈 것일 뿐이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부재가 지르는 비명을 소거할 수 없는 법이다. 오십 명의 다나이데스가 노력한다 해도 사방이 뚫린 물통을 채울 방법은 없다. 소설 한편 한편,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나이데스의 통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누구도 바닥을 메우지 못한다. 항성과도 같은 텅빔이 작가를 에워싼다. 그러므로 어쩌면 소설가가 되는 건 좋은 일일 수도 있겠다.
열린 상태의 운명이란 욕망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이다. 열린 상태는 아메바처럼 세포 분열을 한다. 제 몸을 갈라 다시 생성되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 열린 상태와 욕망은 그들이 침묵의 의지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착각을 준다. 그런데 열린 상태와 욕망은 입을 다무는 법이 절대 없다. 이들은 컴컴한 운명이다. 열린 상태와 욕망은 글쓰기에 강한 자극제처럼 작용한다. 열린 상태와 욕망이 서로 경쟁과 지배의 관계를 이루고, 견뎌낼 수 있는 정도의 차원에서 우리의 고통을 유지해준다. 이들이 우리의 고통을 보살피고, 상처를 한 땀 한 땀 바라보고,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그림자 속에 상처를 놓아두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확실히 작품의 가치란 이런 것이다. 작품은 욕망과 열린 상태 사이에서만 흔들린다.
글 장-클로드 드 크레센조
번역 이현희
[1] 카를로 이솔라, 우리 근원의 미래, 밀롱 출판사, 2004
[2] 인류학과 프랑스 작가(Anthropologue et écrivain français), 1928-2005
[3] 샤를 모롱, 강박적 변신에서 개인적 신화까지 (Des métaphores obsédantes au mythe personnel), José Corti, 1962
[4] 그리스 신화에서 50명의 다나이데스들이 지옥으로 가서 구멍 뚫린 물통에 물을 채우라는 벌을 받는다.